모란데의 와인 레이블에는 들판에 서서 옷자락을 나부끼며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. 한 손이 땅에 꽂은 삽 위에 놓인 걸 보니 그 사람은 오늘 땀 흘려 밭을 일군 모양이다. 꼿꼿한 자세에서 보람과 긍지가 느껴지고, 먼 곳을 응시하는 뒷모습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기세다. 물씬 풍기는 모험가의 도전 정신. 그것이 바로 모란데가 추구하는 철학이다.
[카사블랑카 밸리에 위치한 모란데의 포도밭]
모란데는 1996년 파블로 모란데(Pablo Morande)가 설립했다. 그는 카사블랑카 밸리(Casablanca Valley)에 처음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이다. 카사블랑카 밸리는 칠레 안에서도 대표적인 쿨 클라이밋(cool-climate) 와인 산지다. 칠레 앞 바다는 남극으로부터 올라온 훔볼트 해류가 흐른다. 그 차가운 기운을 바로 맞는 카사블랑카 밸리는 샤르도네, 소비뇽 블랑, 피노 누아 등 서늘한 기후에 맞는 품종이 자라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. 그곳에서 포도는 천천히 익어가며 신선하고 균형 잡힌 맛을 품는다.
모란데의 모험은 카사블랑카 밸리에서 그치지 않았다. 그들은 마울레(Maule)와 이타타(Itata) 등 내륙으로도 눈을 돌렸다. 그곳은 건조하고 포도나무 고목이 많아 고급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다. 특히 마울레는 설립자인 파블로 모란데의 고향이 있는 곳.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빨리 그곳의 잠재력을 알아본 모양이다. 모란데는 지금도 리마리(Limari), 콜차과(Colchagua) 해안지대, 마예코(Malleco) 등 새로운 산지를 개척 중이다. 칠레 안의 숨은 테루아를 찾는 그들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.
모란데는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도 혁신적이었다. 2004년 그들은 1만㎡의 토지 안에 1만 그루 이상의 포도나무를 심는 고밀도 식재를 감행했다. 칠레에서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. 포도나무 한 그루에 허용된 공간이 1㎥가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, 그렇게 빽빽하게 심으면 나무끼리 서로 경쟁을 해서 뿌리가 옆으로 뻗지 못하고 땅속 깊숙이 내려가게 된다. 포도나무로서는 힘든 일이지만 대신 지하수까지 뿌리를 내리고 진정한 테루아의 맛을 낼 수 있게 된다.
[모란데의 콘크리트 에그]
와이너리에는 푸드르(foudre)와 콘크리트 에그(concrete egg) 등을 도입해 용기의 다양성을 꾀했다. 푸드르는 대용량 오크통으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나 작은 오크 배럴과는 또 다른 풍미의 와인을 생산해 낸다. 달걀 모양의 타원형 콘크리트 에그는 네모난 콘크리트 탱크와 달리 내부에서 와인이 계속 회전하기 때문에 발효 시 포도 껍질과 포도즙의 자연스러운 접촉이 가능하다. 같은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도 용기의 크기와 재료가 다양해지면 와인의 맛도 다양해진다. 모란데의 와인이 남달리 풍부한 풍미를 자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.
에스테이트 레세르바(Estate Reserva)
에스테이트 레세르바는 총 8종의 단일 품종 와인으로 구성된 시리즈다. 이 와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고밀도로 식재된 포도밭에서 생산됐다는 점이다. 카베르네 소비뇽(Cabernet Sauvignon)의 경우 마이포 밸리(Maipo Valley)에 위치한 로메랄(Romeral)에서 생산됐는데, 이곳은 1만 ㎡의 토지 안에 10,100 그루의 포도나무가 자라는 곳이다. 포도나무가 많으니 와인 생산량도 많을 거라 생각되지만 양질의 포도를 생산하기 위해 나무 당 수확량을 1kg으로 제한하고 있다. 나무 한 그루에서 와인 한 병이 생산되는 정도다. 이렇게 뛰어난 포도로 만든 와인임에도 에스테이트 레세르바의 가격은 상당히 저렴하다. 프랑스산 오크 배럴에서 12개월간 숙성한 뒤 병입해 6개월 추가 숙성을 거쳐 출시되는데, 블랙커런트, 자두, 라즈베리 등 과일향의 집중도가 탁월하고 담배와 다크초콜릿 풍미가 조화롭다. 탄탄하고 매끄러운 질감도 매력적이다. 최적 음용 온도는 16℃이며 다양한 육류와 즐기기 좋은 와인이다.
그란 레세르바(Gran Reserva)
모란데의 그란 레세르바 시리즈는 테루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와인들로 구성되어 있다. 마이포 밸리, 카사블랑카, 마울레 등 품종 별로 최적지를 찾아 가장 오래되고 우수한 밭에서 자란 포도들이다. 와인을 만들 때도 최신 기술을 적용하되 전통을 존중하는 방식을 적용했다. 총 6 종의 와인 중 3종에 대해 알아보자.
[모란데 그란 레세르바 와인들]
샤르도네는 서늘한 기후를 자랑하는 카사블랑카 밸리의 벨렌(Belen) 밭에서 손수확한 포도로 만들었다. 와인의 40%는 포도 껍질과 함께 발효해 탄탄한 질감을 살렸다. 발효 용기도 크기와 재질 면에서 다양하다. 300리터와 500리터 배럴 그리고 4000리터 용량의 푸드르가 사용됐고 소재도 프랑스산 오크와 아카시아 두 가지로 구성해 다채로운 풍미를 도모했다. 와인의 맛을 보면 사과, 배, 레몬, 자몽 등 과일향이 상큼하고 꽃 향이 은은하다. 헤이즐넛 같은 견과 향도 느껴진다. 풍미와 신맛의 밸런스가 뛰어난 와인이다. 최적 음용 온도는 10℃이며, 양념한 해산물 요리나 닭고기 같은 가금류와 잘 어울린다.
피노 누아는 카사블랑카 밸리 안에서도 가장 서늘한 곳에 위치한 엘 엔수에뇨(El Ensueno) 밭에서 생산됐다. 이곳의 피노 누아는 1997년에 식재된 데이비스(Davies) 클론으로 더 진한 색과 풍부한 아로마를 자랑한다. 숙성 용기로는 300리터와 600리터 프랑스산 배럴과 2000리터 배럴이 사용됐고, 14개월간 숙성을 거쳤다. 맛을 보면 라즈베리와 체리 등 신선한 베리 향이 가득하고 장미꽃과 향신료 풍미도 은은하다. 보디감이 정교하고 우아하며 긴 여운이 매혹적이다. 최적 음용 온도는 12℃이며, 파스타, 돼지고기, 닭고기 등과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.
시라 60%와 카베르네 소비뇽 40%가 섞인 와인도 있다. 카베르네 소비뇽은 칠레를 대표하는 와인 산지인 마이포 밸리의 자갈 밭에서 생산됐고, 시라는 마울레 밸리의 화강암과 진흙 토양에서 생산됐다. 두 곳의 테루아가 만들어낸 하모니가 돋보이는 와인이다. 발효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, 숙성은 프랑스산과 미국산 오크 배럴에 나뉘어 약 18개월간 진행했다. 라즈베리, 블랙베리, 블랜커런트 등 과일향의 집중도가 뛰어나고 다크초콜릿과 계피 같은 향신료 향이 복합미를 더한다.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 속에서 탄탄한 구조감이 느껴진다. 최적 음용 온도는 16℃이며, 소고기, 양고기, 돼지고기 등 다양한 육류와 잘 맞는다.
엘 빠드레(El Padre)
[엘 빠드레 레이블 그림, 포도밭을 보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카베르네 프랑과 카베르네 소비뇽을 연상시킨다]
칠레산 카베르네 프랑을 맛본 적이 있는지? 아직이라면 엘 빠드레를 강력히 추천한다. 카베르네 프랑은 소비뇽 블랑과 함께 카베르네 소비뇽의 부모 품종이다. 그래서 와인 이름도 스페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빠드레다. 카베르네 프랑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맛이 닮은 듯하지만 아로마가 더 향긋하고 보디감이 더 경쾌하다.엘 빠드레는 마이포 밸리의 돌 투성이 땅에 고밀도로 식재된 포도로 만들었다. 마이포 밸리는 칠레의 대표적인 카베르네 소비뇽 산지다. 그런 곳에서 카베르네 프랑 단일 품종 와인을 만들다니. 모란데의 모험 정신이 빛나는 와인이 아닐 수 없다. 포도는 손수확했고,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쳐 건강한 포도알만 모아 발효했다. 프랑스산 오크 배럴에서 18개월간 숙성시킨 뒤 병입해 1년을 추가 숙성시켜 출시했다. 진하고 영롱한 색이 매혹적이고, 검게 익은 갖가지 베리와 커피, 다크초콜릿, 바닐라와 정향 등 향신료 향이 어우러진 풍미에서 중후한 매력이 느껴진다. 최적 음용 온도는 16℃이며, 담백한 육류 요리나 햄, 숙성된 치즈와 즐기면 와인의 풍미가 한층 살아난다. 숙성 잠재력이 좋아 10년 정도는 거뜬히 셀러에 보관하며 즐길 수 있는 와인이다.
하우스 오브 모란데(House of Morande)
마이포 밸리 안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역으로 꼽히는 마이포 알토(Maipo Alto)에 위치한 모란데 최고의 포도밭 산 베르나르도(San Bernardo)에서 생산된 아이콘급 와인이다.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품종으로 한 클래식 보르도 스타일이며, 카베르네 프랑과 카리냥을 약간 섞여 풍미의 다채로움을 더했다. 포도나무 한 그루당 수확량을 1kg 미만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향미의 집중도가 남다르다. 손수확한 포도는 한 알 한 알 검증을 거쳐 우수한 열매만 골라 발효했다. 프랑스산 오크 배럴 (50% 새 오크)에서 12개월간 숙성을 거친 뒤 2000리터와 4000리터 용량의 푸드르로 옮겨 6개월간 추가 숙성시켰다. 계란 흰자로 정제하고 필터링은 생략해 풍미의 손실을 최대한 줄였다. 출시하기 전 1년간 병숙성을 거쳐 풍미의 어우러짐이 좋고 복합미도 느껴진다. 맛을 보면 라즈베리 등 과일향이 달콤하고 향신료와 토스트 향이 은은하다. 묵직한 질감과 정교한 타닌의 밸런스가 탁월하고 긴 여운은 와인의 우아한 말미를 장식한다. 최적 음용 온도는 15~16℃이며, 다양한 육류 두루 잘 어울린다.